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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워니 세상이야기

실패한 세일즈맨 '일회용 면도기를 발명'

by 행복한워니의 기록 2010.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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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속의 불편함은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성인 남자들치고서 일회용 면도기를 사용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주 간단해서 쉽게 발명되었을 것 같은 이 면도기가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은 겨우 100여전이었다. 인류역사를 대충 6,000년으로 잡는다면 무려 5,900년 동안은 자칫 하다간 뺨이나 목덜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위험한 칼로 면도를 했다는 말이 된다.

 

일회용 면도기는 킹 질레트에 의해 발명되었다. 지금도 그가 세운 회사가 면도업계를 장악하고 있다. 세계인구 65억여명중에서 12억명이 질레트 면도기를 사용한다고 하니, 그 수치는 남자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엄청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단한 면도기를 발명한 킹 질레트는 실로 상당한 능력과 배경을 갖춘 인물일 것이라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루종일 발품을 팔아야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고단한 세일즈맨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불편함은 반드시 해결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환경과 타협하지 않고 치열한 노력을 경주했다는 것이었다.  


킹 캠프 질레트(King Camp Gillette)는 1855년 위스콘신 주의 폰드락(Fond du Lac)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주도인 매디슨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한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매디슨, 밀워키 같은 큰 도시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다. 킹의 아버지처럼 수입이 일정치 않은 사람들에게는 살기에 그리 녹녹치 않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킹이 4살로 접어들었을 때 북중부 지역의 최대 도시인 시카고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가난한 사람은 대도시에서 벌어먹을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하드웨어 비즈니스를 벌였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뭔가를 발명하기 위해 창고에 틀여박혔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새로운 음식을 개발한다고 연기와 냄새를 피워댔다. 킹은 그런 부모님이 보기에 좋았다. 자신도 어른이 되면 부모님처럼 뭔가를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의 꾸준한 노력 덕분으로 가정형편도 차츰 좋아졌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한 것이 없을 만큼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일보 후퇴없는 지속적인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 법인가보다.

 

그가 16살 때인 1871년 세계적인 대참사였던 시카고 화재가 발생한 것이었다. 부모님은 다른 시카고 시민들과 다를바 없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실의에만 빠져 있는 것이 가족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인 자신이 살길을 마련하지 않으면 가족이 노숙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경각심이 그의 뇌리를 때렸다.

 

아버지는 밑천하나 없이 빈손으로 벌어먹을 수 있는 곳으로 뉴욕을 생각해냈다. 생각하고 결심하면 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성격인 아버지는 가족을 대동하고 뉴욕으로 이주하였고, 얼마간의 발품을 판 끝에 발명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를 발휘할 수 있는 변리사 사무실에 취직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밤 늦도록 각종 발명품의 설계도를 거실 가득히 펼쳐놓고 연구에 몰두했다.

 

“제대로 된 발명 하나 하면 우리 집안은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다고.”

 

어머니도 새로운 요리법 개발에 열중했다.

 

“저렴한 비용으로 얼마든지 맛있고 영영가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데, 사람들이 그런 것을 모르니 답답하구나. 엄마는 반드시 그런 음식을 개발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줄거야.”

 

아버지가 직장에 다니고는 있다지만 그렇다고 자녀를 대학에 보낼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상당한 재력가가 아니면 자녀들을 대학에 보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킹은 17살이 되면서 대대수의 청소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부를 중단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세일즈맨으로 각종 물건들을 팔아서 그 수당을 버는 일이었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은 보통이요, 때로는 인격모독성 발언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세일즈맨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그 어떤 소리를 들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회사들을 전전하며 주로 생활용품 같은 것을 팔았다.


일확천금을 노리지 않고 인내하며 노력하는 자세를 견지해온 부모님은 차츰 그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점점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킹이 32살때인 1887년 <백악관 요리법(White House Cookbook)>이란 요리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미국 가정주부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최고의 요리책이란 찬사를 받았는데,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인정받은 상태이다.

 

나이가 들면서까지 부지런히 연구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자극을 받은 킹은 세일즈맨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발명에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1890년, 그러니까 그가 35살이 될 때까지 발명품 4가지를 완성하여 특허권을 따내지만 그것들을 제품화하겠다고 나서는 업체는 전혀 없었다. 그는 실의에 잠겼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자본으로 발명품을 제품화시키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자신을 실패자로 규정하기 시작한 그는 러시아와 유럽을 강타한 사회주의 사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발명에 쏟아야 할 시간을 사회주의 연구에 쏟아부었고, 그 결과로 엉뚱하게 <인간적 이동(The Human Drift)>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그는 그 책을 통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생존가능한 비즈니스, 그리고 부유층을 비난하였고 경쟁은 모든 악의 뿌리라고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그는 경쟁이 완전히 제거된 유토피아 사회를 꿈꾸었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벌집같은 주택들로 이어진 황량한 도시가 인간이 살기에 쾌적한 도시로 탈바꿈되어져야 한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동정하거나 돕겠다는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책 출판으로 인해 더욱 깊은 좌절의 늪에 빠져 들었다. 이 세상을 아무리 원망해도 세상 사람들은 그의 주장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좌절 속에서 세월을 낭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에겐 이루어야 할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0살이 되던 1895년 고향인 폰두락으로 돌아가 크라운 코크 앤 실 컴퍼니(Crown Cork & Seal Co.)의 세일즈 맨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사장은 코크 병마개를 발명한 사람으로서 킹이 발명으로 성공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킹을 불러 이렇게 조언했다.

 

“발명으로 돈을 벌고 싶으면 사용하고 금방 내버릴 수 있는 것을 발명하라고. 오래 사용하는 것으로는 돈을 벌지 못해.”

 

그 말을 들은지 얼마되지 않아 매사추세츠 주로 출장 여행을 떠났다. 과다한 업무를 보고 모텔에 들면서 종업원에게 다음날 아침 일찍 깨워달라고 부탁했다. 중요한 거래처와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을 잡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졌는데 종업원이 문을 노크하며 깨우는 것이었다.

 

“손님, 어서 일어나세요. 아침에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그러셨잖아요.”

 

킹은 벌떡 일어나 시계를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세면대로 달려가 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나 조급한 상태였던지라 손이 떨리는 바람에 그만 살점을 베고 말았다.

 

“뭐 이따위 면도기가 다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아직도 이따위 면도기를 쓰고 있다니…”

 

그는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면도하는 손길을 멈추고 말았다.

 

“그래! 서둘러도 베지 않는 면도기를 개발하면 성공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한번 쓰고 버릴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이 면도기는 사용할 때마다 숫돌이나 혁지(革砥)에 갈아야 하는 것이 성가셔. 또 위험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해.”

 

그렇지 않아도 기차 여행중, 작두날 같은 면도기로 면도를 하다가 한두번 살점을 베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위험천만한 흉기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가방에 면도기와 함께 숫돌이나 혁지(革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킹은 생산업자가 날카롭게 날을 세운 면도날을 사용하다가 무뎌지면 부담없이 내버릴 수 있는 면도날을 개발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는 시간을 내어 MIT공대를 찾아가 세계적인 공학 교수들에게 수염을 깎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고, 둔해지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스틸 판을 만들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교수들은 한결같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답만 늘어놓았다.

 

결국 킹은 혼자서 연구에 몰두했고, 실패는 계속되었다. 남들은 ‘이러다간 인생을 망치게 된다’면서 연구 중단을 권유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은 비록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고, 또한 금속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현실화될 수 있다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어느날 우연히 이발소에 들렸다가 이발사가 빗으로 머리카락을 누른후 빗을 뚫고 나온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면도기도 그런 식으로 개발하면 절대로 살을 베지 않을 것 같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하고 연구하다가 윌리암 에머리 니커슨(William Emery Nickerson)라는 발명가이자 개발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와 파트너십을 맺고 공동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5년이란 세월과 엄청난 개발비를 쏟아부은 끝에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면도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면도날을 대량제작할 수 있는 기계 제조회사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1901년 특허를 획득한 후 아메리칸 세이프티 레이저 컴퍼니(American Safety Razor Company)를 설립하였고, 1903년 이중날, 손잡이, 움직일 수 있는 헤드가 달린 면도기를 생산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가 48살 때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때부터 탄탄대로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대량생산을 할 정도로 인기를 끈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판매가가 생산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적자가 누적되었다. 나중에는 더 이상 회사를 꾸려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첫해에 팔린 질레트 면도기의 숫자는 51개, 면도날은 168개에 불과했다.

 

그때 질레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보다 많은 단골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무료로 면도날을 나눠주어 사용케하자는 것이었다. 질레트 면도날의 편리함을 알게 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객이 되어줄 것이라는 가정에서 벌인 모험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년만에 면도기는 9만개, 면도날은 1,240만개가 팔렸다.

 

그는 1904년 이중 면도날에 대한 특허를 획득하고, 회사의 이름을 질레트 안전 레이져(Gillette Safety Razor Company)으로 개명했다.

많은 회사들이 질레트의 아이디어를 도용하여 유사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질레트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경쟁회사들을 사들기도 했다.





그는 55살이 되던 1910년에 면도업계를 완전 평정했다. 그는 이미 갑부로 부상한 상태였다.  상품 포장에 얼굴이 새겨지는 바람에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들로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자본주의적 사고를 버리지 않았다. 여전히 엔지니어들이 주도하는 유토피아적 사회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과 자동차 왕 헨리 포드을 설득하려 했지만 보기 좋게 거부되고 말았다.


기세등등하던 그는 예상치 못한 1929년의 대공항으로 쓸어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질레트 면도기에 투자를 했지만 킹을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존 조이스가 이끄는 중역들의 농간에 휩싸여 자신의 입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는 그후 질레트사의 명예이사직을 유지하면서 석유발굴에 힘쓰다가 성공은 거두지 못한체 1932년 7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질레트는 그후 세계적인 전기면도기업체 브라운(Braun), 오랄-B(Oral-B) 칫솔, 두라셀(Duracell) 건전지, 파카 만년필, 워터맨 문구 같은 일류 브랜드를 매입하여 자회사로 둘 장도로 성장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개혁과 재조정의 기회를 놓치고, 그로 인한 위기로 2005년 세계 최대의 생활용품 업체인 프록터앤 갬블(Procter & Gambel)사에 흡수 되었다. 질렛트는 현재 200여개국이 지사를 두고 있고, 15개국에 32개의 제조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3만 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질레트는 발명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전문가들로부터 절대 불가능하다는 조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다가 무뎌지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면도날 개발에 매진했고, 결국 개발에 성공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후세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청년같이 새파란 아이디어는 종종 잘못된 것이란 오해를 받는다.

*두 눈을 부릅뜨고 기회를 찾아내라.

*기가 막힌 아이디어는 일상적인 문제들에서 나온다.

*당신의 아이디어를 포기하지 말라.

*시장을 확보위해선 과감히 돈을 투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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